새벽 성판악 탐방로 입구에 서면 묘한 동질감이 느껴져요. 비싼 등산복으로 무장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다 같이 똑같은 장면을 떠올리며 산을 오르기 시작하거든요. 교과서에서 봐온 백록담의 모습 말이에요. 파란 하늘을 거울처럼 반사하며 분화구에 가득 차 있는 호수요.
무릎이 끊어질 것 같은 4시간 반의 산행 끝에 해발 1,947미터 정상 전망대에 도착합니다. 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여기저기서 한숨이 새요. 호수는 없고, 갈라진 진흙 바닥 한가운데 발목 깊이의 갈색 물웅덩이만 덩그러니 있거든요. 대부분은 그날의 날씨나 운을 탓하죠.
하지만 이건 운이 나빠서가 아니에요. 백록담이 ‘호수’가 되기 어려운 이유는, 지금 여러분 발밑의 돌에 있습니다.
한라산의 아래쪽은 묽은 용암이 흘러내리며 만든 완만한 몸통이에요. 그런데 화산 활동이 끝을 향해갈 무렵, 마그마가 훨씬 끈적한 성질로 바뀌면서 흐르지 못하고 위로 솟아올라 굳어버립니다. 그게 지금의 가파른 꼭대기 돔이고요.
수만 년 전, 그 꼭대기가 폭발로 날아가며 분화구가 만들어졌습니다. 문제는 그 돔을 이루는 바위가 굳는 과정에서 수직으로 쩍쩍 갈라지는 틈이 아주 많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러니 백록담 바닥은 물을 가둬두는 매끈한 그릇이 아니라, 금이 잔뜩 간 바위들이 얽힌 거대한 채반에 가깝습니다.
태풍이 와서 비가 쏟아지면, 잠깐은 분화구에 물이 아름답게 차오릅니다. 우리가 달력에서 보던 장면도 대개 그 짧은 순간이에요. 하지만 비가 그치면 물은 금세 줄어들죠. 증발해서가 아니라, 바닥의 틈으로 산속 깊이 빠져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스며든 물은 여러 지층을 거치며 여과되고, 제주 곳곳의 용천수와 지하수 순환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마시는 맑은 물도 그 순환계 어딘가에 걸려 있고요.
여기서 하나 더 흥미로운 얘기가 있어요. 과거 기록과 사진을 보면, 백록담이 지금보다 ‘호수’에 가깝게 보이는 시기가 있었거든요. 그 이유를 두고는 여러 설명이 있는데, 그중엔 예전에 분화구 주변에 소와 말을 올려 방목하던 시절, 바닥이 더 단단히 다져져 물이 덜 샜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방목이 사라지고, 비바람과 얼음이 흙을 씻어내면서 바닥의 틈이 더 드러났다는 거죠. 어쨌든 지금의 백록담은, ‘원래부터 물이 오래 머물기 어려운 곳’이라는 성질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 땀을 뻘뻘 흘리며 정상에 도착해 갈색 웅덩이를 마주했을 때, 메말라가는 죽은 호수를 본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오히려 섬 전체로 물을 흘려보내는 거대한 배수 시스템의 입구 위에 서 있는 겁니다. 엽서 속 고요한 파란 풍경으로 고정되기엔, 이 산은 속에서 너무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