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 다이브

기후 변화로 말라가는 은빛 구상나무 숲

기후위기생태계파괴구상나무자연관찰

아름다운 이국적 풍경으로 사랑받지만, 실은 기후 위기로 인해 집단 고사하며 뼈대만 남은 구상나무들의 슬픈 무덤을 걷는 길입니다.

스크립트

가을이나 늦봄에 한라산 영실 코스를 올라가 본 적 있나요. 고도 1500미터쯤, 울창한 숲을 뚫고 아고산대에 접어들면 풍경이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바뀝니다. 등산객들이 멈춰 서서 사진을 찍는 곳이 있어요. 검은 화산암과 짙은 안개 사이로, 껍질이 벗겨진 채 하얗게 말라비틀어진 나무 기둥들이 무리 지어 서 있는 곳이죠. 아름답고도 이상한 그 풍경의 정체를 알고 나면, 우리는 지금 거대한 무덤 한가운데를 걷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 하얀 뼈대들은 구상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원예용으로 특히 사랑받아서, 해외에선 크리스마스 트리 품종으로도 널리 길러져요. 한라산에서 자라던 씨앗과 묘목이 여러 경로로 바깥으로 퍼져나가, ‘보기 좋은 나무’로 세계에 자리 잡은 거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나무가 자연 상태로 숲을 이루는 곳은 거의 여기뿐입니다.

문제는 그 유일한 고향이 지금 실시간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이 산은 물을 붙잡아두기 어렵습니다. 백록담의 물이 틈새로 빠져나가듯, 눈 녹은 물도 땅 위에 오래 머물지 못해요. 그래서 해발 1500미터의 구상나무는 뿌리를 깊게 내리기보다, 얕은 흙 표면을 넓게 움켜쥐듯 뻗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겨울 내내 쌓인 눈이 봄까지 천천히 녹아 떨어뜨리는 그 물에 기대어 살아왔죠.

그런데 기후 변화가 이 리듬을 깨뜨립니다. 요즘 한라산엔 한겨울인 1월이나 2월에도 기온이 훌쩍 오르는 ‘가짜 봄’이 찾아와요. 나무는 겨울이 끝난 줄 알고 물을 끌어올리려 하지만, 눈은 이미 녹아 빠져나가고 얕은 흙은 바짝 말라 있습니다. 숨을 쉬려던 나무는 결국 자기 안의 수분을 건조한 겨울 공기 중으로 빼앗기고, 문자 그대로 말라 죽게 됩니다.

한두 그루가 죽기 시작하면 더 무서운 도미노가 일어나요. 원래 구상나무는 거친 태풍을 견디기 위해 서로 빽빽하게 뭉쳐 자랍니다. 그런데 말라 죽은 나무들이 생겨 숲의 지붕에 틈이 벌어지면, 그 구멍으로 강풍이 들이닥치죠. 뿌리가 얕은 나무들은 버티지 못하고 릴레이 하듯 뽑혀 나갑니다. 숲의 구조 자체가 무너져 내리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걸 막아보려고 애씁니다. 살아남은 나무의 줄기를 천으로 감아 바람을 덜 타게 하기도 하고, 묘목을 길러 옮겨 심어 보기도 해요. 하지만 생존율은 낮습니다. 나무가 필요로 하던, 그 ‘미세한 날씨’ 자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죠.

구상나무를 두고 살아서 백 년, 죽어서 백 년이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목질이 단단해 생을 다한 뒤에도 은빛 유령처럼 서서 오래 버틴다는 뜻이에요. 지금 영실에서 사람들이 카메라에 담는 그 이국적인 풍경은, 바로 그 두 번째 백 년입니다. 살아 있는 숲이 아니라, 사라지는 숲의 시간 위를 걷고 있는 거죠.

다음 스토리

장소 둘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