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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맥의 바위를 자르지 않고 비틀어 세운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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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절대군주 태종조차 건드리지 않은 산줄기의 암반 때문에 인정전 앞마당은 비대칭 사다리꼴이 되었고, 치밀한 착시로 그 삐뚤어짐을 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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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왕위를 차지하려고 이복동생들까지 서슴없이 죽였던 왕이 있어요. 우리가 잘 아는 태종 이방원이죠. 권력을 위해서라면 사람 목을 베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던 이 냉혹한 절대군주가, 절대 건드리지 못하게 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돌덩이, 산의 암반이었어요.

창덕궁의 중심, 인정전에 서면 그 역설적인 흔적을 마주하게 돼요. 인정전은 왕의 즉위식이 열리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조선의 권력이 가장 팽팽하게 집중된 공간이죠. 궁궐의 핵심 공간은 본래 대칭과 일직선으로 권위를 드러내는 게 기본입니다. 경복궁처럼요.

그런데 인정전 마당에 서서 눈으로 가늠해보면 이상한 점이 느껴집니다. 서쪽 회랑은 꽤 길고, 동쪽 회랑은 눈에 띄게 짧아요. 동쪽 담장은 서쪽 담장과 평행하지도 않고, 전각 쪽으로 삐딱하게 안으로 꺾여 들어갑니다. 마당 전체가 한쪽으로 찌그러진 사다리꼴 모양이에요.

이 비대칭의 이유는 전각 뒤에 버티고 있는 응봉의 자락, 매봉정 쪽에서 내려온 단단한 암반 때문이었습니다. 풍수지리의 세계에서 이 산줄기는 단순한 흙과 돌이 아니라, 북쪽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용맥이었죠. 회랑을 세우려고 땅을 파던 사람들이 그 암반을 만났을 때, 선택지는 두 가지였습니다. 바위를 깨고 밀어붙이거나, 건물을 바위에 맞추거나.

조선은 두 번째를 택합니다. 태종 대 창덕궁 조영에 관여한 기술 관료 박자청을 비롯한 이들이, 산을 자르는 대신 건물을 비틀기로 결심한 거예요. 동쪽 회랑의 길이를 줄여서 바위가 밀고 들어온 자리를 피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찌그러진 마당을 그대로 드러낼 순 없잖아요. 그래서 장인들은 ‘보이지 않게 만드는’ 쪽으로 더 큰 노력을 쏟습니다. 마당에 깔린 화강암 바닥돌, 박석을 보면 격자처럼 딱 반듯하지 않죠. 돌의 크기와 모양을 미세하게 불규칙하게 맞춰, 공간의 왜곡이 눈에 걸리지 않게 흡수해 버립니다.

그리고 관료들이 품계에 따라 늘어서는 품계석은 어좌를 기준으로 반듯한 선을 만듭니다. 사람의 눈은 기준점이 곧으면, 주변도 당연히 곧을 거라고 믿거든요. 지붕 선까지 포함해 전체가 대칭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아주 정교한 착시입니다. 바위 하나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수학을 쓴 거죠.

더 놀라운 건 이 구조가 이어진 방식이에요. 1592년 임진왜란 때 창덕궁은 잿더미가 됩니다. 그리고 광해군 시기에 다시 세워지죠. 선정전의 청기와 집착으로도 드러나는 그 시기의 ‘재건 강박’ 속에서도, 인정전 마당만큼은 끝내 산을 자르지 않는 원칙을 다시 선택합니다. 폐허의 잔해를 꼼꼼히 측량해, 이 삐딱하고 불편한 사다리꼴을 옛 모습대로 되살려요.

우리는 흔히 ‘자연과의 조화’라는 말을 낭만적인 장식처럼 씁니다. 하지만 인정전의 사다리꼴 마당은 그 조화가 얼마나 엄격하고 치열한 선택이었는지 보여줍니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가 자신의 권위를 가장 똑바로 세워야 할 자리에서, 일부러 한쪽을 내어준 거예요.

지금도 인정전 마당 동쪽 끝으로 걸어가 보면 그걸 느낄 수 있습니다. 서쪽보다 바닥이 아주 미세하게 높고, 회랑의 폭은 살짝 더 비좁게 느껴지죠. 국가의 중심으로 불쑥 밀고 들어온 산, 그리고 기꺼이 한 걸음 물러서서 길을 내어준 왕권의 자리가 거기에 남아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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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이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평지에 그은 반듯한 직선이라면, 창덕궁은 굽어진 산세를 따라 청기와와 유리창, 왕조의 영광과 몰락을 켜켜이 얹어낸 생생한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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