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을 걷다가 희정당 앞에 서면, 마당의 공기가 한 번 꺾입니다. 전각 아래로 포장된 길이 둥글게 들어오고, 현관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거든요. 원래 궁궐의 마당은 흙과 돌을 밟고 걸어 들어가며 스스로를 낮추게 만드는 공간인데, 여긴 자동차가 들어오도록 길을 내준 자리였습니다.
당시 순종이 타던 서양식 자동차가 이 앞에 멈춰 섰겠죠. 왕은 흙먼지 묻은 마당을 건너지 않고, 차 문에서 곧바로 실내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고요해야 할 궁궐의 한복판에 ‘편의’가 먼저 도착한 장면이에요. 그리고 그 편의는, 왕권이 약해진 시대의 얼굴이기도 했고요.
이 변화는 1917년 화재에서 시작됩니다. 내전이 큰 불로 타버린 뒤, 왕의 처소를 다시 짓는 과정이 이어졌어요. 그때 새로 세워진 희정당엔 다른 궁궐 전각에서 가져온 부재들이 섞여 들어간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권위를 복원하는 재건이라기보다, 비용과 통제를 계산한 재조립에 가까웠죠. 선정전의 파란 지붕이 ‘돈이 아까워서’ 살아남았듯, 희정당의 재건도 ‘상징’보다 ‘실용과 관리’가 먼저 손익을 따진 결과였습니다.
안으로 시선을 옮기면, 그 계산은 더 분명해져요. 원래라면 신하들이 바닥에 엎드려 왕을 맞이했겠죠. 그런데 이곳엔 온돌 대신 서양식 카펫이 깔리고, 커튼이 드리워지고, 사람들은 의자에 앉는 방식으로 바뀝니다.
천장을 올려다보면 전통 우물천장 아래에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습니다. 전기를 넣기 위해 나무 구조 사이로 전선이 지나가고요. 창호지 대신 유리창이 끼워진 자리도 눈에 띕니다. 한지는 빛을 부드럽게 거르고 바람을 통하게 해 건물이 숨 쉬게 하지만, 유리는 빛을 날카롭게 가두고 내부를 다른 기후로 만들어버리죠. 난방은 라디에이터 같은 방식으로 대체되고, 생활의 편의 시설도 함께 들어옵니다. 오래된 건물이 가진 호흡이, 다른 시대의 재료로 덮여버린 셈이에요.
그런데 이 낯선 비율 속에서도, 어떻게든 ‘조선의 그림’을 붙잡아보려 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실내 벽 상단의 벽화들이죠. 서양식 실내 비례에 맞춰 벽이 높아지면서, 미닫이문 위로 한옥에는 원래 생기지 않는 긴 빈 공간이 생겼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금강산을 그린 벽화가 걸립니다. 아름답지만 어쩐지 낯선 이유는, 전통의 화면이 서양식 방의 크기에 맞춰 억지로 늘어난 탓일 거예요.
희정당은 그래서 더 조용히 서늘합니다. 밖에서는 자동차가 들어오던 현관이, 안에서는 유리창이 빛을 가두는 방식이,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편의가 들어온 자리에, 왕의 권위가 함께 들어온 건 아니었다는 것. 그 어긋남이 이 전각에 남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