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건너뛰기
지금 관람 가능

가기 전에 알아두세요

⚖️

궁궐 한 곳만 고른다면? 더 조용한 관람과 후원을 원하면 창덕궁을 고르세요. 후원은 별도 시간제 입장권이 필요합니다. 웅장한 규모와 첫 서울 여행의 대표 경험은 경복궁이 낫습니다.

여행 시작점

장소 이야기 · 챕터 5개 · 공개 오디오 없음

챕터를 골라보세요

  1. 여기서 시작

    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안아낸 궁궐

    반듯한 선 대신 자연의 지형에 기대어 지어진 창덕궁은 조선의 왕들이 가장 오래 머물렀으며 비교적 최근까지 사람의 온기가 남아있던 공간입니다.

    오디오 준비 중 · 대본 제공
    대본 읽기

    창덕궁에 들어서면 다른 궁궐과는 조금 다른 기분을 느끼실 거예요. 경복궁이 평지 위에 반듯하게 선을 그어 만든 공간이라면, 창덕궁은 원래 있던 산과 언덕의 생김새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품어 안았거든요. 건물들이 자연의 흐름에 가만히 기대어 있는 셈이죠. 그래서 이곳의 길은 반듯한 일직선이 아니라 굽이굽이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사실 조선의 왕들이 가장 오랜 시간 머물며 나라를 다스린 진짜 무대는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들이 모두 불타버린 뒤 가장 먼저 다시 지어졌기 때문이에요.

    무엇보다 이곳은 그저 먼 옛날의 유적이 아닙니다. 불과 1989년까지, 조선 왕실의 마지막 후손들이 이 궁궐 안 낙선재에 실제로 머물렀거든요. 비교적 최근까지 사람의 온기가 남아있던 공간인 거죠.

    여기서는 자연이 권위에 맞춰 꺾이기도 하고, 권위가 자연 앞에서 한 발 물러서기도 합니다. 어떤 전각에선 색 하나가 나라 살림을 흔들고, 또 어떤 마당에선 근대의 편의가 조용히 침입해요.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이, 낙선재의 나무 기둥들 사이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습니다.

  2. 전쟁의 공포와 체면이 구워낸 푸른빛 기와

    광해군이 나라 살림을 휘청이게 하면서도 권위를 증명하려 집착했던 값비싼 청기와 전각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비싸 부수지 못하고 살아남았습니다.

    오디오 준비 중 · 대본 제공
    대본 읽기

    인정전 마당에서 ‘산을 피해 건물을 비튼’ 창덕궁의 원리를 봤다면, 이번엔 반대로—색 하나 때문에 나라 살림이 비틀린 장면을 보게 됩니다.

    창덕궁을 걷다 보면 단정한 잿빛 기와지붕이 이어지죠. 그런데 그 사이에서, 눈이 시릴 만큼 파란 지붕이 하나 불쑥 튀어나옵니다. 선정전입니다. 이 궁궐에서 거의 유일하게 청기와를 이고 있는 전각이죠.

    이 파란색이 왜 여기에 남았는지 알게 되면, 그저 아름다운 장식으로 보이진 않을 거예요. 당시엔 ‘보기 좋은 색’이 아니라, 전쟁 뒤의 불안과 체면, 그리고 국고의 압력을 한꺼번에 끌어안은 색이었거든요.

    비밀은 회회청이라는 안료에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이슬람권에서 들어온 파란색, 코발트였죠. 조선에는 나지 않았고, 중국에서도 늘 넉넉하진 않았습니다. 명나라를 오가는 사신들이 베이징에서 값비싸게 구해와야 했어요.

    도자기 푸른 무늬엔 아주 조금만 들어가도 되지만, 지붕은 다릅니다. 기와는 수천 장이고, 그 넓은 면을 고르게 푸르게 만들려면 회회청이 말 그대로 ‘물량’으로 필요했죠. 게다가 청기와는 한 번 구운 기와에 유약을 발라 다시 굽는 방식이라, 온도가 조금만 어긋나도 색이 탁해지거나 유약이 망가져 버립니다. 완벽한 한 장을 얻기 위해 실패한 기와가 쌓였고, 그 위에는 값비싼 코발트가 그대로 발려 있었어요.

    그럼에도 이런 일을 벌인 건 광해군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직후, 궁궐은 불타고 민생은 무너진 때였죠. 광해군은 다시 무너지지 않을 나라의 얼굴을, 눈에 보이는 권위로 세우려 했습니다. 선정전 같은 중심 전각을 ‘특별한 색’으로 덮는 일은 장식이라기보다, 불안한 시대에 권위를 증명하려는 강박에 가까웠어요. 푸른빛은 동쪽과 봄을 뜻하는 상징 체계 위에 올라타, 왕권의 정당성을 더 단단히 보이게 해주길 기대받았고요.

    하지만 값이 문제였습니다. 회회청 조달과 청기와 제작을 둘러싸고, 조정 안에서는 비용과 백성의 부담을 우려하는 상소가 이어집니다. 땔감 소모와 공역의 부담, 그리고 먼 길을 거쳐 들어오는 재료값까지. ‘지붕의 색’이 국가 운영의 논쟁거리가 되어버린 거죠.

    결국 이 집착은 광해군을 끌어내리는 명분 중 하나가 됩니다. 인조반정 이후 새 권력은 광해군이 추진하던 건축들을 정리하고, 재목을 돌려 민생을 수습하려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선정전의 아이러니가 시작됩니다.

    파란 지붕을 마주한 사람들은, 이념으로만 밀어붙이기가 어려웠습니다. 부수기엔 너무 비쌌거든요. 값비싼 안료로 완성된 청기와 전각을 허물어버리는 대신, 결국 해체해 옮겨와 선정전의 지붕으로 다시 올립니다. ‘없애야 할 사치’였는데도, 계산기를 이기진 못한 거죠.

    그 뒤로 조선은 청기와를 다시 널리 굽지 않았고, 이런 사치를 막으려는 금지와 경계가 더 강해집니다.

    이제 창덕궁의 잿빛 지붕들 사이에서 선정전의 그 쨍한 파란색을 만나면, 잠시 멈춰 보세요. 지금 보고 있는 건 고요한 미학의 상징만이 아닙니다. 전쟁 뒤의 공포가 만든 체면, 나라 살림의 압박, 그리고 없애지 못하고 남겨버린 선택이—푸른빛으로 굳어, 여기까지 온 겁니다.

  3. 서양식 편의가 소리 없이 침입한 왕의 처소

    화재 이후 재건된 희정당은 자동차가 들어오고 유리창과 샹들리에가 깔리며, 왕권이 쇠퇴하던 시대에 실용과 타협한 궁궐의 민낯을 보여줍니다.

    오디오 준비 중 · 대본 제공
    대본 읽기

    창덕궁을 걷다가 희정당 앞에 서면, 마당의 공기가 한 번 꺾입니다. 전각 아래로 포장된 길이 둥글게 들어오고, 현관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거든요. 원래 궁궐의 마당은 흙과 돌을 밟고 걸어 들어가며 스스로를 낮추게 만드는 공간인데, 여긴 자동차가 들어오도록 길을 내준 자리였습니다.

    당시 순종이 타던 서양식 자동차가 이 앞에 멈춰 섰겠죠. 왕은 흙먼지 묻은 마당을 건너지 않고, 차 문에서 곧바로 실내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고요해야 할 궁궐의 한복판에 ‘편의’가 먼저 도착한 장면이에요. 그리고 그 편의는, 왕권이 약해진 시대의 얼굴이기도 했고요.

    이 변화는 1917년 화재에서 시작됩니다. 내전이 큰 불로 타버린 뒤, 왕의 처소를 다시 짓는 과정이 이어졌어요. 그때 새로 세워진 희정당엔 다른 궁궐 전각에서 가져온 부재들이 섞여 들어간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권위를 복원하는 재건이라기보다, 비용과 통제를 계산한 재조립에 가까웠죠. 선정전의 파란 지붕이 ‘돈이 아까워서’ 살아남았듯, 희정당의 재건도 ‘상징’보다 ‘실용과 관리’가 먼저 손익을 따진 결과였습니다.

    안으로 시선을 옮기면, 그 계산은 더 분명해져요. 원래라면 신하들이 바닥에 엎드려 왕을 맞이했겠죠. 그런데 이곳엔 온돌 대신 서양식 카펫이 깔리고, 커튼이 드리워지고, 사람들은 의자에 앉는 방식으로 바뀝니다.

    천장을 올려다보면 전통 우물천장 아래에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습니다. 전기를 넣기 위해 나무 구조 사이로 전선이 지나가고요. 창호지 대신 유리창이 끼워진 자리도 눈에 띕니다. 한지는 빛을 부드럽게 거르고 바람을 통하게 해 건물이 숨 쉬게 하지만, 유리는 빛을 날카롭게 가두고 내부를 다른 기후로 만들어버리죠. 난방은 라디에이터 같은 방식으로 대체되고, 생활의 편의 시설도 함께 들어옵니다. 오래된 건물이 가진 호흡이, 다른 시대의 재료로 덮여버린 셈이에요.

    그런데 이 낯선 비율 속에서도, 어떻게든 ‘조선의 그림’을 붙잡아보려 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실내 벽 상단의 벽화들이죠. 서양식 실내 비례에 맞춰 벽이 높아지면서, 미닫이문 위로 한옥에는 원래 생기지 않는 긴 빈 공간이 생겼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금강산을 그린 벽화가 걸립니다. 아름답지만 어쩐지 낯선 이유는, 전통의 화면이 서양식 방의 크기에 맞춰 억지로 늘어난 탓일 거예요.

    희정당은 그래서 더 조용히 서늘합니다. 밖에서는 자동차가 들어오던 현관이, 안에서는 유리창이 빛을 가두는 방식이,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편의가 들어온 자리에, 왕의 권위가 함께 들어온 건 아니었다는 것. 그 어긋남이 이 전각에 남아 있습니다.

  4. 산맥의 바위를 자르지 않고 비틀어 세운 마당

    냉혹한 절대군주 태종조차 건드리지 않은 산줄기의 암반 때문에 인정전 앞마당은 비대칭 사다리꼴이 되었고, 치밀한 착시로 그 삐뚤어짐을 숨겼습니다.

    오디오 준비 중 · 대본 제공
    대본 읽기

    조선 초기, 왕위를 차지하려고 이복동생들까지 서슴없이 죽였던 왕이 있어요. 우리가 잘 아는 태종 이방원이죠. 권력을 위해서라면 사람 목을 베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던 이 냉혹한 절대군주가, 절대 건드리지 못하게 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돌덩이, 산의 암반이었어요.

    창덕궁의 중심, 인정전에 서면 그 역설적인 흔적을 마주하게 돼요. 인정전은 왕의 즉위식이 열리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조선의 권력이 가장 팽팽하게 집중된 공간이죠. 궁궐의 핵심 공간은 본래 대칭과 일직선으로 권위를 드러내는 게 기본입니다. 경복궁처럼요.

    그런데 인정전 마당에 서서 눈으로 가늠해보면 이상한 점이 느껴집니다. 서쪽 회랑은 꽤 길고, 동쪽 회랑은 눈에 띄게 짧아요. 동쪽 담장은 서쪽 담장과 평행하지도 않고, 전각 쪽으로 삐딱하게 안으로 꺾여 들어갑니다. 마당 전체가 한쪽으로 찌그러진 사다리꼴 모양이에요.

    이 비대칭의 이유는 전각 뒤에 버티고 있는 응봉의 자락, 매봉정 쪽에서 내려온 단단한 암반 때문이었습니다. 풍수지리의 세계에서 이 산줄기는 단순한 흙과 돌이 아니라, 북쪽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용맥이었죠. 회랑을 세우려고 땅을 파던 사람들이 그 암반을 만났을 때, 선택지는 두 가지였습니다. 바위를 깨고 밀어붙이거나, 건물을 바위에 맞추거나.

    조선은 두 번째를 택합니다. 태종 대 창덕궁 조영에 관여한 기술 관료 박자청을 비롯한 이들이, 산을 자르는 대신 건물을 비틀기로 결심한 거예요. 동쪽 회랑의 길이를 줄여서 바위가 밀고 들어온 자리를 피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찌그러진 마당을 그대로 드러낼 순 없잖아요. 그래서 장인들은 ‘보이지 않게 만드는’ 쪽으로 더 큰 노력을 쏟습니다. 마당에 깔린 화강암 바닥돌, 박석을 보면 격자처럼 딱 반듯하지 않죠. 돌의 크기와 모양을 미세하게 불규칙하게 맞춰, 공간의 왜곡이 눈에 걸리지 않게 흡수해 버립니다.

    그리고 관료들이 품계에 따라 늘어서는 품계석은 어좌를 기준으로 반듯한 선을 만듭니다. 사람의 눈은 기준점이 곧으면, 주변도 당연히 곧을 거라고 믿거든요. 지붕 선까지 포함해 전체가 대칭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아주 정교한 착시입니다. 바위 하나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수학을 쓴 거죠.

    더 놀라운 건 이 구조가 이어진 방식이에요. 1592년 임진왜란 때 창덕궁은 잿더미가 됩니다. 그리고 광해군 시기에 다시 세워지죠. 선정전의 청기와 집착으로도 드러나는 그 시기의 ‘재건 강박’ 속에서도, 인정전 마당만큼은 끝내 산을 자르지 않는 원칙을 다시 선택합니다. 폐허의 잔해를 꼼꼼히 측량해, 이 삐딱하고 불편한 사다리꼴을 옛 모습대로 되살려요.

    우리는 흔히 ‘자연과의 조화’라는 말을 낭만적인 장식처럼 씁니다. 하지만 인정전의 사다리꼴 마당은 그 조화가 얼마나 엄격하고 치열한 선택이었는지 보여줍니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가 자신의 권위를 가장 똑바로 세워야 할 자리에서, 일부러 한쪽을 내어준 거예요.

    지금도 인정전 마당 동쪽 끝으로 걸어가 보면 그걸 느낄 수 있습니다. 서쪽보다 바닥이 아주 미세하게 높고, 회랑의 폭은 살짝 더 비좁게 느껴지죠. 국가의 중심으로 불쑥 밀고 들어온 산, 그리고 기꺼이 한 걸음 물러서서 길을 내어준 왕권의 자리가 거기에 남아있어요.

  5. 화려한 단청을 거부하고 지은 벌거벗은 기둥

    외척의 감시 속에서 숨을 돌리고 싶었던 헌종이 단청 없이 사대부 집처럼 지은 낙선재는, 역설적으로 왕조의 마지막 후손들이 머무는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오디오 준비 중 · 대본 제공
    대본 읽기

    창덕궁을 걷다 보면 단청이 시야를 꽉 채웁니다. 붉은 기둥과 초록, 푸른색, 금빛이 처마 아래 빈틈없이 얹혀 있죠. 나무를 보호하는 기능도 있지만, 더 큰 메시지는 하나였습니다. 이 공간의 주인이 누구인지 선포하는 것.

    그런데 궁궐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낙선재를 만나면, 온도가 달라져요. 단청이 없습니다. 칠하지 않은 소나무 기둥이 빛을 그대로 받아, 하얗고 회색빛으로 바래가죠. 궁궐 한가운데에 양반집 사랑채 같은 얼굴이 놓여 있는 겁니다. 실수가 아니라, 의도였습니다.

    이 선택을 이해하려면, 이곳을 지은 헌종을 봐야 해요.

    여덟 살에 왕이 된 아이의 삶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세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같은 거대한 외척 가문들이 정치를 쥐고 흔들던 시절이었습니다. 소년 왕은 결정된 일에 고개만 끄덕여야 하는 존재였죠. 먹고, 자고, 공부하는 모든 순간이 감시 아래 있었고요. 그에게 궁궐의 화려한 단청은 권위의 장식이 아니라, 자신을 가두는 울타리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성인이 된 헌종은 후궁 간택 과정에서, 자신의 뜻을 조금이라도 밀어 넣어 보려 합니다. 정치적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한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고, 그는 그 여인을 경빈으로 맞이하죠. 남이 써준 대본대로만 살던 왕이, 드물게 만들어낸 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가 원한 건 ‘권위의 무대’가 아니라, 숨을 돌릴 방이었어요. 그래서 1847년 낙선재를 지으며 가장 중요하게 내린 지시가 이것이었습니다. 단청을 칠하지 마라.

    헌종은 궁 밖 사대부들의 삶을 동경했고, 책과 시, 골동품 같은 세계로 몸을 숨기곤 했습니다. 낙선재를 양반집 사랑채처럼 꾸민 것도 그 연장선이었죠. 단청을 거부한 건 건축적인 역할극이었습니다. 무거운 곤룡포를 벗고, 선비의 옷으로 갈아입겠다는 경계선. 칠하지 않은 문지방을 넘는 순간만큼은, 그는 ‘전하’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숨 쉬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낙선재는 색 대신 질감과 빛으로 완성됩니다. 창살 무늬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창호지를 통과한 빛은 궁궐의 강한 햇빛을 한 번 걸러 부드럽게 바꿔놓죠. 뒤뜰로 가면, 칠하지 않은 나무가 뒷산 풍경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 더 또렷해집니다. 둥근 만월문 너머로 꽃과 나무를 바라보는 시선은, ‘왕의 시선’이라기보다 도망친 사람의 시선에 가깝고요.

    이토록 조용한 집이 슬프게 느껴지는 건, 이 도피가 너무 일찍 끝났기 때문일 겁니다. 낙선재가 완공되고 고작 2년 뒤, 헌종은 스물두 살에 세상을 떠나거든요.

    그리고 훗날, 인트로에서 말한 ‘1989년까지의 온기’가 왜 하필 낙선재에 남았는지—그 이유가 바로 이 무단청의 선택에 있습니다. 왕조가 무너진 뒤에도, 이곳은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마지막 거처가 되었죠. 덕혜옹주가 말년을 의탁했고,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도 1989년까지 머물렀습니다.

    헌종이 잠시나마 왕관의 무게를 내려놓고 싶어 세운 벌거벗은 기둥들이, 결국엔 왕조의 마지막 숨을 가장 조용히 받아준 셈입니다.

미리 둘러보기

이곳의 이야기

경복궁이 조선의 엄격하고 반듯한 얼굴이라면, 창덕궁은 왕들이 가장 오래 머물며 정사를 보고 삶을 이어간 실제 거처입니다.

평지를 다져 반듯하게 올린 다른 궁궐들과 달리, 지형을 밀어내지 않았습니다. 매봉산 자락의 산세와 계곡을 따라 건물을 툭툭 앉혔어요. 그래서 궁 안을 걷다 보면 규격화된 대칭의 압도감 대신, 발길을 돌릴 때마다 산의 굴곡을 따라 새로운 마당과 전각이 나타나는 입체적인 시야를 경험하게 됩니다. 조선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500년 왕조의 가장 찬란했던 르네상스와 비극적인 끝이 모두 얽혀 있는, 가장 조선다운 궁궐입니다.

시작은 피를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자신의 칼에 형제들이 쓰러진 경복궁에 머물기를 꺼렸습니다. 그래서 1405년, 동쪽 산자락에 새로운 궁을 짓고 창덕궁이라 이름 붙였죠.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탄 후, 광해군은 터가 안 좋다는 이유로 경복궁 대신 이곳을 먼저 재건했습니다. 이후 경복궁이 폐허로 방치된 270여 년 동안 창덕궁은 조선의 심장이 되었습니다. 정조가 젊은 학자들과 조선의 르네상스를 도모한 주 무대였으며, 1910년 대한제국의 숨통을 끊은 경술국치 조약이 결정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 장소가 들어간 Seoul 일정 찾기공개된 일정을 둘러보고 내 여행에 맞는 코스를 골라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