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으레 아기자기하다거나 운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북촌이 넓은 한옥으로 권위를 보여준다면, 서촌의 거미줄 같은 골목은 서민들의 소박한 삶의 터전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이 복잡한 길들은 사실, 아주 오랫동안 억눌렸던 사람들의 좌절감이 만들어낸 물리적인 미로에 가깝습니다. 수성동이 ‘자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설계된 복원이었던 것처럼요.
조선 시대, 이 인왕산 자락의 좁은 계곡에는 중인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나라의 실무를 맡던 통역관, 의관, 천문학자, 회계 같은 전문직들이었죠. 하지만 이들에게는 결코 깨지지 않는 투명한 천장이 있었습니다.
통역관들을 예로 들어볼게요. 이들은 베이징으로 가는 사신단에 합류해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고, 은과 비단 같은 물건뿐 아니라 서양의 시계나 지도 같은 지식을 함께 들여왔습니다. 세상이 바뀌는 속도를 몸으로 아는 사람들이었죠.
그런데 신분제 때문에, 이들은 아무리 똑똑하고 돈이 많아도 과거 시험의 최종 단계인 문과를 볼 수 없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는 건 물론이고, 가진 부를 마음껏 드러내는 것조차 제한됐죠. 위로 뻗지 못한 에너지와 욕망은 결국 옆으로, 골목으로 스며듭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문화로 폭발해요.
1786년, 하급 관리 천수경이라는 인물이 수성동 계곡 근처 큰 바위에 ‘송석원’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시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봄가을이 되면 중인들이 대규모로 모여들었고, 비번인 의사와 통역관과 온갖 실무자들이 인왕산 소나무 아래서 횃불을 밝히고 술을 마시며 밤새 시를 지었죠. 그 열기가 너무 커서, 양반들조차 슬쩍 끼어들고 싶어 했다고 해요.
이 시기 서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묘한 감정이 자리 잡습니다. 우울한데, 동시에 오만한 자신감. 19세기 중인 출신 화가 조희룡의 매화 그림을 보면 그게 느껴져요. 양반들처럼 절제된 선이 아니라, 폭력적일 만큼 거칠고 두껍게 먹물을 흩뿌리죠.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이름 없는 이웃들의 전기를 책으로 남깁니다. 왕조의 기록이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스스로 역사 속에 박아 넣은 거예요.
이 울분과 네트워크는 마침내 사상으로도 번집니다. 1850년대, 청나라를 오가며 세계의 변화를 목격한 통역관 오경석은 금서로 지정된 개혁 서적들을 들여와 서촌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가르쳤어요. 의관 유기환 같은 이들과 함께, 이 좁은 골목 안에 새로운 공부의 회로를 만든 겁니다. 훗날 조선을 흔들었던 개화의 흐름은, 그런 회로들 중 한 갈래에서 힘을 얻기도 했겠죠.
그러니까 서촌의 골목은 단지 ‘서민적’이라서 좁아진 게 아닐지도 몰라요. 올라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 옆으로 뻗으며 만든 문화의 통로, 기록의 통로, 연결의 통로. 그게 이 동네의 오래된 골격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