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건너뛰기
장소 가이드

Photo: dorian-lee · Pixabay Content License

가기 전에 알아두세요

추천 시간
아침 또는 늦은 오후
마지막 검토 · 2026년 7월 10일
요금
사찰 경내 무료, 유료 문화 프로그램은 별도
공식 출처로 확인 · 2026년 7월 10일 출처 ↗
소요 시간
45~90분
마지막 검토 · 2026년 7월 10일
휴무
예불·기도·행사 일정에 따라 출입이 달라질 수 있어요
공식 출처로 확인 · 2026년 7월 10일 출처 ↗
혼잡
예불과 행사 시간에는 분위기와 동선이 달라져요
마지막 검토 · 2026년 7월 10일

운영 시간, 요금, 휴무는 바뀔 수 있어요. 출발 전에 해당 출처에서 다시 확인해 주세요.

여행 시작점

장소 이야기 · 챕터 4개 · 공개 오디오 없음

챕터를 골라보세요

  1. 여기서 시작

    화려한 강남 빌딩 숲 품은 천년 고찰

    고층 빌딩과 빠른 도심의 속도 한가운데서 천이백 년의 고요한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봉은사의 이색적인 대비를 만나봅니다.

    오디오 준비 중 · 대본 제공
    대본 읽기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풍경이 완전히 바뀝니다. 화려한 강남 한복판, 코엑스 맞은편에 자리한 봉은사입니다.

    높은 빌딩 숲 아래로 향 냄새가 번지고, 묵직한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낯설고도 매력적인 조화는 이곳이 품은 천이백 년의 시간 덕분이에요.

    경내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23미터 높이의 거대한 미륵대불이 나타납니다. 빽빽한 고층 빌딩을 배경으로 고요하게 서 있는 모습은 유독 강렬한 인상을 남기죠.

    대불 가까이에 있는 건물, ‘판전’도 천천히 둘러보세요. 화재를 피하고 살아남은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안에는 불경을 새긴 수천 개의 낡은 목판들이 빼곡히 보관되어 있어요. 처마 아래 걸린 투박한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 말년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오래된 나무 기둥 위로 떨어지는 그림자가 길 건너 도시의 빠른 속도와 묘한 대비를 이룹니다.

  2. 추사 김정희가 마지막으로 비워낸 글씨

    봉은사 판전 현판에 걸린 삐뚤빼뚤한 두 글자에는 평생 기교를 좇던 추사 김정희가 말년의 병중에서 덜어낸 묵직한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오디오 준비 중 · 대본 제공
    대본 읽기

    절의 가장 깊숙한 곳, 언덕 꼭대기에 단청조차 칠해지지 않은 소박한 전각이 있습니다. 판전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볼 건 건물보다, 처마 아래 걸린 나무 현판이에요. 널 판 자에 전각 전 자. 판전.

    동양 서예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두 글자를 보는 순간 잠깐 멈칫할 겁니다. 어딘가… 서툴러 보이거든요. 글씨가 유난히 크고, 균형도 한쪽으로 기울어 있고, 획 끝은 날렵하게 치고 나가지 못한 채 뭉툭하게 멈춘 듯합니다.

    그런데 이 글씨는 누가 흉내 낸 게 아닙니다.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썼다고 전해져요. 노년에, 병을 앓던 몸으로요.

    이 어설퍼 보이는 현판이 왜 오히려 ‘절정’으로 불리는지 알려면, 한 가지 감각만 붙잡으면 됩니다. 대교약졸. 큰 솜씨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죠.

    추사는 한때 기교와 균형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어요. 치밀하게 계산된 선, 날카로운 긴장, 완벽한 배열. 그런데 말년의 그는 그걸 붙잡지 않습니다. 손끝의 힘을 억지로 세우지도, 흔들림을 숨기지도 않아요. 무거운 붓이 가는 대로, 먹이 번지는 대로, 그대로 두죠.

    현판의 왼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큰 글자 옆에 아주 작은 세로 글씨가 붙어 있습니다. 거창한 호 대신 이렇게 적혀 있어요. 칠십일, 병중작. 일흔하나, 병중에 썼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두 글자는 ‘이름표’가 아니라, 몸의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난 기록처럼 느껴집니다. 바깥에서는 땅과 권력과 거래가 거대한 규모로 움직였을지 몰라도, 이 전각 안쪽에서는 결국 한 사람이 마지막에 가까운 자리에서 무엇을 비웠는지가 남아 있거든요.

    판전이 품고 있는 건 수천 장의 목판입니다. 무겁고 꿈쩍하지 않는 진리를 나무에 새겨, 빼곡히 쌓아둔 공간이죠. 그 문패로 이보다 더 어울리는 글씨가 있을까요. 두 글자 자체가, 툭 잘라 놓은 나무토막처럼 묵직합니다.

  3. 사찰의 옛 땅 위로 솟아오른 강남의 빌딩들

    강남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오아시스가 아니라, 봉은사가 소유했던 거대한 땅이 팔리고 쪼개지며 지금의 화려한 테헤란로와 코엑스가 되었습니다.

    오디오 준비 중 · 대본 제공
    대본 읽기

    봉은사 마당에서 고개를 들어보면, 화려한 처마 선 너머로 코엑스와 아셈타워의 유리 외벽이 번쩍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이렇게 생각하죠.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한복판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고즈넉한 오아시스라고요.

    하지만 이건, 시선을 거꾸로 본 겁니다. 봉은사가 ‘버텨낸’ 게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강남이라고 부르는 이 풍경이, 봉은사의 땅에서 시작됐습니다.

    1960년대 후반, 지금의 강남은 아직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논밭과 범람원이 섞인 넓은 들판이었고, 그 한가운데에 봉은사 소유의 큰 땅이 자리하고 있었죠. 개발은 필요했고,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도로를 내고 다리를 놓을 자본이 부족하던 정부는 큰 토지를 한 번에 묶어 계획을 만들고, 기반시설이 깔린 뒤 가치가 오른 땅을 다시 나누는 방식으로 공사를 굴렸습니다. 그러려면 담보처럼 쓸 ‘커다란 땅’이 필요했어요.

    그 시선이 봉은사로 향했습니다.

    1970년 무렵, 봉은사 땅의 상당 부분이 정부로 넘어가는 거래가 진행됩니다. 면적과 금액은 자료마다 다르게 언급되지만, 중요한 건 한 가지예요. 천 년 넘게 이어진 사찰의 땅이 ‘도시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현금화되기 시작했다는 것. 그 과정에서 당사자였던 봉은사 쪽은 배제됐다고 느꼈고, 현장에서는 격렬한 반발이 이어졌습니다.

    더 씁쓸한 건, 그 돈이 흘러간 방향입니다. 조계종은 그 자금으로 종로 한복판의 총무원 청사를 세우고, 동국대학교 같은 기반을 뒷받침했습니다. 한국 현대 불교의 제도적 권력이, 말 그대로 봉은사의 살을 떼어내어 자란 셈이죠. 그래서 판전 처마 밑의 ‘병중작’ 두 글자가 더 묘하게 들립니다. 바깥에서 그렇게 큰 거래가 오가던 시대에도, 가장 안쪽에는 비워냄의 감각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넘어간 땅 위에는 무엇이 올라섰을까요. 공기업과 기업들이 이 지역으로 옮겨오고, 남은 필지들은 쪼개져 팔리면서, 강남의 골격이 만들어집니다.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업무지구, 코엑스를 둘러싼 유리와 철골의 밀도. 지금 여러분이 마주 보는 스카이라인은 ‘사찰 옆에 생긴 도시’가 아니라, 사찰의 옛 부지와 겹치며 자라난 도시입니다.

    이 역사의 농담은 2014년에 한 번 더 커집니다. 옛 봉은사 부지와 겹치는 핵심 구역 가운데 하나였던 한전 부지가 시장에 나오고, 현대차그룹이 그 땅을 10조 원대에 낙찰받아요. 같은 땅이, 같은 자리에서, 완전히 다른 숫자로 다시 거래된 겁니다.

    그러니 봉은사에서 길 건너 빌딩들을 바라볼 때, ‘도시에 둘러싸인 절’만 떠올리면 반쪽이에요. 저 유리벽과 도로와 지하의 상업공간은, 어느 순간부터 봉은사의 땅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결과입니다. 오늘의 강남은, 그 오래된 영지가 잘리고 팔리고 계획 속에 재배치된 뒤 남은 지도 위에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4. 신분제의 바닥을 흔들었던 불교 부흥의 거점

    조선 시대 억불 정책 속에서도 문정왕후와 보우 스님이 승과를 부활시키며 가장 불온하고 치열한 정치적 실험을 벌였던 무대였습니다.

    오디오 준비 중 · 대본 제공
    대본 읽기

    하지만 16세기 중반, 이곳은 한양에서 가장 위험하고 불온한 정치적 요새 중 하나였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고, 승려의 도성 출입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어요. 불교는 제도적으로 밀려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1545년, 열두 살의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시작한 문정왕후는 방향타를 거칠게 꺾습니다. 불교를 다시 끌어올리려 했고, 그 파트너로 보우라는 승려를 선택해요. 그리고 봉은사를, 불교 부흥의 거점으로 삼았죠.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1550년대 초 무렵 벌어집니다. 보우를 중심으로 한 불교 세력이 ‘승과’, 즉 승려를 뽑는 국가 시험의 부활을 밀어붙인 거예요. 과거 시험은 양반 권력을 움직이는 통로였는데, 그 문턱에 승려들이 올라서게 된 겁니다.

    전국에서 숨어 지내던 승려들과 학자들이 몰려들어 경전을 논하고 수행으로 실력을 겨뤘습니다. 합격하면 국가가 인정하는 지위와 면역이 주어졌고, 보우 역시 전례 없는 수준의 권력을 쥐게 됩니다. 신분제의 바닥이 흔들리는 순간이었죠.

    성리학자들은 패닉에 빠졌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통곡했고, 궁궐에 상소를 쏟아냈어요. 봉은사를 불태워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지만, 문정왕후는 밀어붙입니다. 반대파를 누르며 보우를 지켰죠.

    아이러니는, 이 실험의 그림자가 훗날 전쟁의 시대에까지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임진왜란 때 전국에서 조직된 승병은 무너진 조선을 버티게 한 중요한 축이었고, 그 배경에는 국가가 승려 집단을 다시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시도가 겹쳐져 있습니다. 봉은사에서 벌어진 일들이 단순한 종교 행사가 아니라, 국가가 어떤 집단을 인정하고 배제하는 방식 그 자체였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보우는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방패도 함께 사라져요. 승과는 빠르게 정리되고, 보우는 권력을 잃은 채 제주로 유배됩니다. 그리고 기록에 따르면, 유배지에서 가혹한 처우 끝에 생을 마감했죠.

    그래서 봉은사의 땅을 걷다 보면, 단지 고요한 절을 지나고 있다는 느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자리는 시대마다 다른 이름의 권력이 정면으로 부딪치던 자리였어요. 한때는 ‘시험’과 ‘제도’의 언어로, 훗날에는 ‘개발’과 ‘계약’의 언어로, 봉은사는 늘 그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습니다.

미리 둘러보기

사진 출처: dorian-lee (Pixabay Content License) , cperezor (Pixabay Content License)

이곳의 이야기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와 마주 선 사찰입니다. 8차선 횡단보도를 건너면 거대한 쇼핑몰과 빌딩 숲의 소음이 잦아들고, 오래된 목조 건물과 묵직한 예불 소리가 곧바로 공간을 채웁니다. 도심 한가운데서 사찰의 일상을 묵묵히 이어가며, 한국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신라시대인 794년 '견성사'로 창건되었고, 조선 성종의 명복을 빌던 정희왕후가 사찰을 중창하며 지금의 '봉은사'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조선의 혹독한 억불 정책 속에서도 이곳은 불교의 숨통을 틔운 진원지였습니다. 16세기, 문정왕후와 보우 스님은 폐지되었던 승과 고시를 이곳에서 부활시킵니다. 그때 발탁된 젊은 승려들이 훗날 임진왜란의 판도를 바꾼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입니다. 1562년 보우 스님이 풍수를 짚어 사찰을 지금의 수도산 자락으로 옮기며 다져둔 기틀 덕분에, 조선 불교는 유림의 거센 반발과 그의 순교 속에서도 온전히 명맥을 이을 수 있었습니다.

1939년 대화재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경내 전각 대부분이 잿더미가 되었을 때도 유일하게 '판전'만은 화마를 피했습니다.

이 장소가 들어간 Seoul 일정 찾기공개된 일정을 둘러보고 내 여행에 맞는 코스를 골라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