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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자본에 맞서 싸운 최초의 주식회사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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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시장은 단순한 옛날 장터가 아니라, 1905년 일본 상인들의 상권 장악을 막기 위해 조선의 상류층이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세운 거대한 방어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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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의 종이 한 장이 아직 남아 있어요. 우아한 붓글씨로 적힌 주권—광장주식회사의 주식 증서입니다. 많은 사람이 광장시장을 오래된 장터로만 떠올리지만, 이곳은 시작부터 ‘회사’였어요. 상설시장 운영을 주식회사로 꾸린, 아주 이른 근대적 실험 가운데 하나였죠.

왜 그런 걸 만들었느냐. 그해 서울의 상권이 급속히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상인들이 서울 중심부에 자리를 잡고 상업 네트워크를 넓혀가던 때였고, 금융 제도와 화폐 정리가 밀어붙여지면서 상인들의 유동성이 급격히 말라갔어요. 대를 이어 장사하던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휘청거렸고, 자본은 헐값에 핵심 상권을 가져가기 시작했죠.

이걸 지켜보던 조선의 상류층이 있었습니다. 고위 관료 김종한, 그리고 훗날 두산의 뿌리가 되는 박승직 같은 인물들이요. 이들은 상소문이나 시위 같은 방식으로는, 당대의 ‘금융 전쟁’을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했어요. 일본이 주식회사와 독점 자본이라는 무기를 쓴다면, 우리도 똑같은 무기로 방어벽을 세워야 한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1905년 7월, 자본을 모아 광장주식회사를 세우고 곧장 땅을 사들입니다. 일본 상인들이 그 안에 들어와 공간을 사거나 임대하기 어려운, 조선인 중심의 상업 구역을 만들려는 목적이었죠. 말하자면 ‘시장’의 형태를 한 거대한 자본의 바리케이드였습니다.

‘광장’이라는 이름에도 흔적이 남아 있어요. 원래는 청계천의 광교와 장교 사이에 시장을 지으려 했고, 그래서 앞글자를 따 광장이라 불렀죠. 하지만 지반이 약하고 장마철 범람까지 겹치면서 계획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법인 등록이 된 이름을 바꾸긴 쉽지 않았고, 그래서 발음은 그대로 두고 한자를 바꿔 ‘넓게 모아 간직한다’는 뜻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처음 광장시장이 강했던 품목도, 이런 방어의 논리에서 나왔어요. 일본이 쉽게 통제하거나 복제하기 어려운 것들—농수산물, 그리고 무엇보다 한복을 짓는 명주나 베, 무명 같은 전통 옷감의 공급망을 붙잡았죠. 조선의 돈이 조선인들 사이에서 돌게 만드는 생태계를 만들려 했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걷는 광장시장은, 그 초기의 설계도대로만 남아 있지 않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서울은 파괴됐고, 시장을 관리하던 구조도 함께 무너졌어요. 휴전 이후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빈자리를 메웠고, 사적인 요새였던 공간은 거칠게 점유되며 성격이 바뀌어 갔습니다. 그 변화 속에서 이곳은 ‘무엇을 파느냐’보다 ‘어떻게 버티느냐’가 더 중요해졌어요. 속도, 공정, 보이지 않는 연결망—겉으로는 어수선해 보여도, 시장은 그런 시스템으로 다시 굴러가기 시작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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