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 다이브

배달 오토바이의 속도에 맞춰 그려낸 굵은 붓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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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판에 넙적한 붓으로 빠르고 굵게 칠해 흔들리는 시야에서도 잘 읽히게 했던 간판 글씨는, 오늘날 감성을 자극하는 대표적인 레트로 폰트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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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골목을 걷다 보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있어요. 머리 위로 어지럽게 매달린 낡은 철제 간판들. 그리고 그 간판에 찍힌, 밑동이 묵직한 글씨입니다. 유튜브 자막이나 포스터에서 흔히 보는 ‘을지로 느낌’의 레트로 글씨는, 사실 취향이 아니라 작업 환경에서 태어났어요.

컴퓨터 디자인도, 커팅 시트지도 없던 시절. 간판은 철판 위에 에나멜 페인트로 직접 그렸습니다. 예술가의 서체라기보단,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기술에 가까웠죠. 글자 수대로 값을 받으니 빨라야 했고, 그래서 세필이 아니라 넓고 납작한 붓을 쥐었습니다.

납작한 붓에 끈적한 페인트를 푹 찍어 ‘ㅏ’를 내려그어 보세요. 붓을 떼는 순간 중력 때문에 밑바닥이 툭 두꺼워집니다. 동그란 이응을 매끈하게 돌릴 여유가 없으니, 붓을 몇 번 꺾어 다각형처럼 칠해버리고요. 투박하죠.

그런데 이 투박함은 대충의 흔적이 아니었습니다. story1에서 황동이 우유 상자에 담겨 오토바이로 넘어가던 그 속도, 그 속도에서 읽히는 글씨가 필요했어요. 골목의 배달 오토바이는 흔들리는 차체로, 전선과 불꽃 사이를 비집고 다녔고, 작업자들은 한눈에 가게를 알아봐야 했거든요. 밑줄이 무겁고 획이 굵은 글씨는, 흔들리는 시야에서도 확 꽂히는 가독성의 형태였습니다. 블루칼라의 속도에 맞춘 산업 디자인이었던 거예요.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이 동네의 낡은 분위기를 멋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는 그 간판들을 사진으로 모아 글씨의 형태를 디지털로 옮깁니다. 페인트가 뭉친 밑동, 각진 이응, 바짝 좁아진 자간까지요. 그렇게 만들어진 폰트는 금세 ‘레트로 감성’의 상징이 됩니다. 원래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한 글씨였는데, 이제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글씨가 된 거죠.

더 기묘한 건 그다음이에요. 화면 위에서 너무 말끔해지자, 사람들은 다시 ‘낡은 맛’을 원합니다. 그래서 디지털 글자에 일부러 거칠게 흔들림을 넣고, 닳은 자국을 입히고, 가짜 시간을 덧칠해요. 현장에서 생긴 흔적이 취향이 되고, 그 취향을 맞추기 위해 흔적을 제조하는 단계로 넘어간 겁니다.

을지로의 글씨는 원래, 골목의 속도에 맞춘 읽힘의 기술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기술이 떼어져 어디서나 쓰이는 ‘느낌’이 됐죠. 가장 실용적인 형태가, 가장 추상적인 기호로 바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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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쇳소리를 내던 철제 셔터가 닫히면, 기름때 묻은 낡은 계단 위로 서울의 가장 젊은 밤이 켜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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