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온천장 거리를 걷다 보면, 번쩍이는 네온사인과 목욕탕 간판들이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 동네가 처음부터 누구나 와서 즐기는 곳이었던 건 아니에요.
조선시대에 이 뜨거운 물은 휴양이라기보다 ‘약’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고, 이용은 엄격히 통제됐습니다. 지방 관리들이 주변을 관리했고, 고위 양반이나 왕실과 가까운 사람들만 머물 수 있는 시설이 따로 있었죠. 평민들의 출입은 거칠 정도로 막혔고요. 물을 흐리면 약효가 망가진다고 믿었으니까요. 동래는 오랫동안, 부산항의 번잡함과는 떨어진 조용한 요양지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시선이 달라집니다. 온천, 그러니까 ‘온센’을 쾌락과 비즈니스가 만나는 장소로 본 그들에게 이 계곡은 “돈이 되는 물”이었어요. 문제는 거리였습니다. 항구에서 동래까지 오려면 길이 멀고 불편했거든요.
그래서 1915년, 부산 도심과 동래를 곧장 잇는 전차가 놓입니다. 항구 쪽에서 출발한 전기 전차가 동래에 닿는 순간, 수백 년 동안 유지되던 ‘특정한 사람들만 쓰는 물’의 질서는 사실상 무너졌어요. 이제는 단돈 몇 푼이면, 바닷가의 도시에서 이 내륙 온천까지 빠르게 올라올 수 있게 된 겁니다.
전차 종점 주변부터 풍경이 바뀌었습니다. 땅은 빠르게 매입되고, 일본식 료칸들이 들어섰죠. 가시이 도요타로가 종점 앞 요지에 세운 ‘봉래관’ 같은 초호화 료칸을 시작으로, 숙박과 술집과 유흥이 한 덩어리로 붙기 시작합니다. 안개 낀 계곡은 어느새 게타 소리와 연주, 취기가 섞인 웃음소리로 채워졌고요.
전차는 동래를 “가끔 가는 요양”에서 “퇴근하고도 들르는 소비”로 바꿔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비를 가장 잘 굴리기 좋은 형태로 동네가 다시 짜였죠. 종점 중심으로 상점들이 촘촘히 붙고, 걷기 편한 바둑판 골목이 생겨났습니다. 전통적인 마을의 질서라기보다, 전차에서 쏟아지는 사람들을 받아내기 위한 상업의 구조였어요.
1945년 해방 이후 일본은 떠났지만, 길과 터와 방식은 남았습니다. 일본식 료칸은 한국식 여관과 대중목욕탕으로 바뀌었고, 그 주변에는 술집과 식당이 자리를 이어받았죠. 한 번 열린 ‘대중화’의 문은 다시 닫히지 않았습니다.
전차 선로는 1968년에 사라지고, 그 위로 도로가 깔렸습니다. 하지만 오늘 동래의 큰 길을 따라 걷는다는 건, 한 세기 전 사람들이 욕망을 싣고 오가던 그 경로 위를 그대로 걷는 일이기도 해요. 철길은 아스팔트 아래 묻혔지만, 동래를 “오게 만드는 힘”은 아직도 그 길을 타고 움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