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 다이브

1930년대 대량생산된 근대형 한옥의 탄생

개량한옥정세권부동산개발근대건축

북촌의 골목은 조선 시대 양반의 유산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에 맞춰 규격화된 자재로 빽빽하게 지어 올린 개량 한옥들의 흔적입니다.

스크립트

가회동 골목에 들어서면, 지붕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회색빛 기와들이 물결처럼 이어지고, 처마 선이 한 방향으로 고르게 흐르죠. 처음 보는 사람은 '수백 년을 이어온 전통 마을'이라는 인상을 받기 쉬운데, 사실 이 통일된 느낌 자체가 꽤 최근에 만들어진 겁니다.

북촌의 한옥들은 원래 저마다 다르게 늙어 있었어요. 집집마다 덧댄 방식이 달랐고, 지붕 위에 올라간 재료도 제각각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가 되면 기와 대신 함석이나 슬레이트를 얹은 집도 있었고, 처마 아래에 알루미늄 창호를 끼운 집도 흔했죠.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집을 살기 편하게 고쳐 왔고, 그 흔적들이 골목 풍경에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위에 서울시의 보존 정책이 얹혔습니다. 지원금을 받으려면 지붕은 전통 기와로, 처마 선은 정해진 높이 범위 안으로, 담장 재료도 지정된 기준에 맞춰야 했어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동네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정렬되도록 설계된 조건이었죠. 오늘 우리가 보는 통일된 기와의 물결은, 그 정렬 작업의 결과입니다.

흥미로운 건, 그 규제가 골목 안의 생활은 바꾸지 못했다는 점이에요. 지붕과 담장은 규정이 잡고 있지만, 집 안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1930년대의 작은 필지에, 지금 기준으로 넉넉한 공간을 원하는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방법이 등장했거든요. 땅을 아래로 파고드는 겁니다.

골목을 걸으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대문을 열면 안에 지하 공간이 이어지는 집들이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건 수납 공간이나 주차 구역인데, 규모가 크면 서재나 작업실, 때로는 다른 목적의 넓은 지하로 이어지기도 해요. 골목에서 보이는 단층짜리 단출한 대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밖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동네는 그런 식으로 지상과 지하가 분리된 채 운영되고 있어요.

그리고 북촌에는 또 하나의 층위가 있습니다. 방문자들의 시선이죠.

가회동 31번지 언덕은 하루에도 수백 명이 스마트폰을 꺼내드는 장소입니다. 내려다보이는 기와지붕과 남산 타워가 한 프레임에 들어오는 각도, 거기에 최적화된 골목이에요. 좋은 사진이 나오는 위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알아냅니다. 웹에 올라온 게시물들이 거의 같은 앵글을 공유하고, 그 앵글을 찾아 같은 자리에 서는 사람들이 매일 다시 쌓입니다.

이 동네가 유명해지면서 주민들의 일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아침 일찍 대문을 열면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일이 생기고, 골목 안으로 들어오는 목소리와 발소리는 시간을 가리지 않습니다. 가회동과 삼청동 일부 골목에는 정숙 안내판이 붙어 있고, 이른 아침과 늦은 밤에는 통행을 제한하는 시간대도 생겼죠. 유명해진 동네가 관광지로 관리되기 시작하는 어느 지점에서, 주민들은 자기 동네의 주인이기도 하고 배경의 일부이기도 한 처지가 됩니다.

그래서 북촌 골목을 걸을 때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 눈에 '잘 보존된 전통 마을'로 보이는 이 풍경 안에, 정책이 고른 지붕색과 처마 선이 있고, 지하에 숨은 현대적인 공간이 있고,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서는 사람과, 그 사람들과 조용히 공존해야 하는 주민이 함께 있다는 것. 보이는 것과 실제로 돌아가는 것이 항상 같은 건 아닌 동네입니다.

다음 스토리

장소 둘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