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봉은 한눈에 봐도 다르게 생겼습니다. 백운대 옆에서, 매끈하고 둥근 화강암 벽이 거의 70도 각도로 치솟아 있어요. 해발도 810미터 안팎. 손으로 잡을 만한 틈이나 튀어나온 바위도 거의 보이지 않죠.
그런데 그 매끄러운 절벽 위에 작은 점들이 있습니다. 빨강, 파랑, 노랑. 아주 느린 속도로 바위를 기어오르는 사람들입니다. 1화에서 ‘아무것도 설치되지 않은 곳’이라던 그 인수봉은, 그래서 오르는 방식 자체가 달라요.
처음 보면 저건 그냥 무모함처럼 보일지 몰라요. 하지만 저기서 벌어지는 건, 한국 산악 등반의 감각이 만들어지는 아주 정교한 물리학입니다.
저 사람들은 지금 바위를 ‘잡고’ 오르는 게 아닙니다. 잡을 게 없으니까요. 이들은 오로지 등반화 밑창의 끈적한 고무 마찰력에 생존을 겁니다. 납작한 앞코를 화강암에 밀착시키고, 고무와 바위 표면 사이의 마찰을 믿는 거죠. 이걸 스미어링, 마찰로 버티는 슬랩 등반이라고 부릅니다.
이 등반의 진짜 고통은 근육보다 심리에 있어요. 절벽에 매달려 아래를 내려다보면, 인간의 본능은 바위에 몸을 바짝 붙이라고 비명을 지릅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가슴과 골반을 벽에 밀착시키게 되죠. 그런데 인수봉에서는 그 순간이 위험합니다. 몸을 붙이면 무게 중심이 바뀌면서 발끝에 실리던 체중이 빠지고, 고무는 마찰을 잃고 미끄러질 수 있거든요.
살아남으려면 본능과 정확히 반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골반을 벽에서 떼고, 상체를 꼿꼿이 세워요. 종아리 근육으로 자기 몸무게를 발끝에 눌러 싣고, 발뒤꿈치는 최대한 낮춥니다. 바위 위에 선다기보다, 마찰이라는 얇은 믿음 위에 떠 있는 셈이죠.
이런 역설은 오래전부터 인수봉을 훈련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장비가 넉넉하지 않던 시절, 사람들은 낡은 로프와 손에 넣을 수 있는 최소한의 철물로 저 벽을 올랐고, 그만큼 발놀림과 균형에 더 집요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 다시 인수봉을 자세히 건너다보세요. 암벽 중간쯤,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 있는 널찍한 턱이 보일 겁니다. 오아시스라고 불리는 곳이에요. 좋은 날이면 그 좁은 바위턱에 클라이머들이 모여 병목처럼 잠시 멈춥니다. 금속 카라비너가 부딪치는 소리, 로프가 움직이는 소리, 짧은 구호들이 바람에 실려 와요.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건 기술만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까마득한 절벽 위에 앉아 파트너의 로프를 잡아주고, 서로의 숨과 떨림을 받아줍니다. 내 생명줄을 쥔 사람을 믿는 법, 공포가 목까지 차올라도 발끝에 다시 체중을 싣는 법. 그런 습관과 감각이, 저 좁은 바위턱 위에서 세대를 건너 전해졌겠죠.
그러니 다음에 북한산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다 인수봉을 보게 되면, 저 작고 다채로운 점들을 한 번 더 오래 바라봐 주세요. 저건 단순한 스릴이 아니라, 잡을 게 없는 벽에서 살아남는 법을 서로에게 가르치고 배우는 시간입니다. 몸을 바위에서 떼고, 발끝으로 다시 일어서는—그 이상한 원리를, 오늘도 조용히 반복하면서요.
